영화,음악,소설,예술

사진작가 최영모 - 근육과 뼈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다.

게디 2010. 5. 16. 14:14

한국의 사진가들

500명 넘는 무용가 찍은 무용사진의 대가 최영모씨


우리 몸만큼 경이로운 피사체는 없다. 사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수많은 사진가들이 사람의 몸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세계적인 사진가 디앤 아버스는 소외된 사람들의 몸을 카메라에 담아 그들의 아픔을 표현했고, 조엘피터 위트킨은 기괴하게 변형된 몸을 찍어 인간의 고통을 드러냈다. 한국의 사진가 최영모(54)씨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주목한 몸은 '무대 위의 몸'이다. 무대에서만 존재하는 몸, 그곳에서만 날개를 펴는 몸은 그가 사랑한 피사체다.

한달에 인화지만 1천만원씩 구입

최영모씨는 28년간 무용사진가로서 한길을 걸어왔다. 방송사나 신문사 같은 안정된 직장을 다닐 기회도 있었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한번쯤 다른 사진가처럼 이름을 높이기 위해 색다른 사진 작업을 시도해볼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가슴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무대 아래에서 셔터를 눌렀다. "(무용가들의) 움직임이 너무 좋았어요. 보고 있으면 나까지 가슴이 뜁니다. 정지한 것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뛰고 구르고 휘감아 도는 무용가들의 몸짓은 그의 카메라를 거쳐 숨 막히는 한장의 몸짓으로 다시 태어났다.

최씨가 무용사진가로서 처음 카메라를 든 때는 1983년이다. 무용사진만 찍겠다고 나서는 사진가가 드문 시절이었다. 실력 있는 사진가는 더더욱 없었다. 불모지 같은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뜻밖에 풋사과 같은 첫사랑 때문이었다. "20대에 처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상대가 무용을 전공한 이였지요"라고 말하고 웃는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자신의 카메라로 표현해보고 싶은 다른 세상의 몸짓이었다. 현대무용, 발레, 한국무용 등 몸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녔다. 무용가들은 점점 그를 찾았다. 그들은 자신의 춤을 기록하거나 세상에 발표하기 위해서 사진이 꼭 필요했다. 그가 찍은 무용사진은 정확하고 특별했다. "스테이지 포토(무대사진)는 안무자의 의도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짧은 몇 초 사이에 무대 위로 20㎝ 이상 뛰어오른 발레리나의 동작을 놓치지 않고 앵글에 담아내야 했다. 미세한 운동감은 사진을 빛내는 요소였다. "지금은 디지털카메라로 찍기 때문에 노출(빛의 양)을 금방 확인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요."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출이다. 적절한 빛의 양이 필름에 닿지 않으면 '사진'은 없다. 그런 면에서 무용사진은 불리한 조건이 많다. 공연장은 어둡다. 오로지 빛이라고는 무대 위 조명뿐이다. 조명은 춤사위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움직이는 동작은 고속셔터로 찍어야 제대로 나온다. 빛의 양이 더 필요하다는 소리다. 사진가는 이 모든 악조건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노출 공포가 있었어요. 최종 사진이 나올 때까지 절대로 안심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무대 위의 적정노출을 잡아내는 데 귀재였다. 증감현상법(필름 감도에 맞는 화학 현상 시간보다 더 늘려서 필름을 현상하는 것)도 자주 사용했다. 입자는 조금 거칠지만 정확한 동작이 인화지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포드 현상액이 수입이 되면 모두 사버렸어요. 밤새 현상하고 프린트했어요"라고 말한다. 안방은 그의 암실이었다. 모든 빛이 사라진 밤 12시부터 밤새 작업을 했다. "아내가 고맙지요. 아내는 지금까지 한번도 안방을 차지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을 잇는다. 그는 최고급지로 인화했다. 한달에 종이값만 1000만원이 넘었다.

유명 무용가들의 '벗은 무용' 사진집도 펴내

그는 공연장에서 방음 커버를 씌우고 사진을 찍는다. 조금이라도 공연에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무대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도 있었다. 이때 한가지 조심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오케스트라가 무대 아래 있을 때죠. 어두워서 잘못하면 그 아래로 떨어집니다. 크게 다칠 수도 있어요."

1993년 몇번의 전시회를 연 후 한권의 사진집을 냈다. 첫번째 사진집은 아니었지만 반향은 컸다. 사진집 < 당스 뉘 > (DANSES NUES)는 무용가 30여명을 그의 스튜디오로 불러, 뛰고 구르는 벗은 몸을 찍은 것이었다. 벗은 무용가들의 사진은 처음이었다. 30여명 중 11명만이 사진집 게재를 허락했다.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무용가들이다. "'춤이 옷을 벗다'라는 개념으로 시작했어요. 사진 속의 그런 동작을 할 수 있는 무용가는 1%도 되지 않아요." 이 과감한 사진집은 그의 인생의 위기에서 출발했다. 87년 돌연 위암 선고를 받은 후에 곰곰이 인생에서 남길 것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그때부터 꾸준히 작업한 사진을 한권으로 묶었다.

2006년에 사진집 < 뮤즈 팔레트 > (MUSE PALETTE)도 냈다. 무용평론가 고 김영태 선생과 함께 작업한 사진집이다. 현대무용가 안은미씨부터 발레리나 강예나씨까지 31명의 무용가들이 기괴한 분장을 하고 사진 속에 서 있다. "김영태 선생님을 존경했지요. 발레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함께 작업하고 싶었는데 돌아가셨어요"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오랜 세월 카메라로 춤추는 무용가였다. 대한민국에서 '무용 좀 한다'는 소리 듣는 이치고 그의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은 이가 없다. 지금까지 500명이 넘는다. "훈련된 몸이 드러내는 근육과 뼈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고요 속에 파격적인 열정이 충격적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무용인들과 가족처럼 지냈다. 독일 출신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슈(1940~2009)와의 우정도 사진으로 남겼다. "피나는 검은 옷만 입죠. 한국에 있는 저를 포함한 여러 친구들을 만나러 왔을 때 고운 한복을 입혀 사진을 찍었어요." 그가 찍은 피나 바우슈의 사진은 스튜디오 한쪽 벽을 채우고 있다. 피나 바우슈처럼 이미 죽은 이의 사진이 그의 작업실에는 많다. "아플 때 저는 아무리 친해도 찾아가지 않아요. 그들이 가장 아름다웠을 때만을 기억하죠. 죽었다는 생각 안 해요. 보고 싶을 때마다 사진을 봐요"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한국무용가 이매방 선생을 찍고 있다. 이매방 선생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자신의 마지막 책을 그에게 부탁했다.

그는 내용을 말하기 수줍어 하는 '자신만의 다른 작업'도 준비중이다. 수박이 제철을 맞아 익으면 빨간 속살을 세상에 선보이듯이 때가 되면 그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