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방문자수 1위 인터넷 신문 '허핑턴포스트' 창업자
'허핑턴'
모두 말렸던 55세 인터넷 창업, 미디어 업계 판도 바꾸다
뉴욕= 이신영 기자 /조선일보 2013.5.18.
NYT 온라인版 제치고 美 인터넷신문 1위로… 이카로스 이후 가장 높이 난 그리스人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나갔다가 기권 그 때 인터넷의 위력 뼛속 깊이 깨달아…
지난 4월 24일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곳의 브로드웨이가(街).
15층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렸다. 넓은 사무실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상들. 그 위에 놓인 노트북 수백여 대의 화면들이 반딧불처럼 다소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그 앞의 기자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면서 키보드를 두들기거나 전화기에 외쳐대고 있었다.
▲ 아리아나 허핑턴 여사는 52세에 블로그에 처음 글을 썼고, 55세에 인터넷 신문사를 창업했다. 지인들은“인터넷 창업은 20대나 하는 짓”이라고 뜯어말렸지만 그녀는 늘 그랬듯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두려워하며 사는 인생은 진정한 자아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라고 말했다. / 블룸버그 |
북적이는 시장통 같은 이 사무실 한쪽 벽 전면엔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허핑턴포스트(Huffington Post).’ 2005년에 창간돼 뉴욕타임스 온라인판을 제치고 미국에서 방문자 수 1위를 차지한 인터넷 신문이다. 영국·프랑스·캐나다·스페인에 이어 최근 일본에 진출해 허핑턴포스트 현지판을 만들었다.
창업자이자 편집장 사무실 앞엔 ‘아리아나(Arianna)’라는 이름표가 단출하게 붙어 있었다. 복도 끝에서 방 주인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타나 기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리아나 허핑턴(63) 여사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우먼 20인’(포브스, 2013년)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타임, 2006·2011년)에 선정됐고, 영국 텔레그래프지는 그녀를 ‘이카로스(그리스 신화 속의 신) 이후로 가장 높이 올라간 그리스인’이라고 묘사했다.
하얀색 실크 재킷에 녹색 문양이 그려진 스카프를 목에 두른 그녀의 피부는 희고, 잡티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녀는 우아한 금발에 동그란 눈에, 키도 177cm로 컸다. ‘공주병’ 할머니 느낌이 왔다.
그러나 그녀가 말문을 열자 기자의 환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그녀의 영어 발음에서 말 도중에 ‘엠…’ 하고 이어가는 억센 그리스식 억양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오! 안녕하세요? 제가 많이 늦었죠? 엠… 어제 늦게 콜롬비아 출장에서 돌아왔거든요.”
한때 그녀에겐 큰 키도, 그리스식 억양도 모두 콤플렉스였다. 사춘기 때 그녀는 큰 키 때문에 절대 남자 친구를 사귀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케임브리지대 유학 시절엔 억센 그리스 억양 때문에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는 내면의 비판적 목소리에 굴복하는 대신 그 목소리를 관찰하면서 두려움을 통제할 수 있었고, 창의적 계획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6년 전 과로해 졸다가 머리를 책상에 부딪혀 광대뼈가 부러져 얼굴에 다섯 바늘을 꿰멨고, 그 뒤로 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주제로 테드(TED)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하루에 몇 시간 잘까?
“(웃음) 7~8시간은 푹 자요. 그리고 회사엔 기자 수면방이 두 곳 있어요. 거기엔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몰라요(웃음). 허핑턴포스트엔 잠을 주제로 한 섹션(sleep section)도 있는데, 지난 1년간 750만명이나 방문했어요. 저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웰빙하는 것이 미래에 큰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금융계에선 밤 11시나 12시에도 새 이메일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건 전혀 지속 가능하지 않아요.”
―‘수퍼 디바’나 ‘인맥의 여왕’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로 적도 내 편으로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면서요? 비결이 있나요?
“핵심 원칙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다움을 빨리 알아내고 그걸 가슴 깊숙이 인정해 주는 거예요. 또 우리는 모두 연결돼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해요. 그래야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전 어딜 가나 사람들을 제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요. 한번은 찰리 로즈(미국의 유명 토크 진행자)와 만났는데, 제가 발목을 접질렸어요. 그때 소개받은 전문의가 있었는데, 저는 그 사람을 허핑턴포스트의 블로거로 데려왔어요. 이런 식으로 책방 주인, 우연히 만난 청소년도 모두 블로거로 데려왔어요.”
허핑턴포스트의 직원은 기자와 편집자, 엔지니어를 모두 합쳐 전 세계에 675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글을 쓰는 블로거가 4만명에 이른다. 여기엔 마돈나, 존 케리 상원의원, 마이클 무어 감독, 존 체임버스 시스코 회장도 포함돼 있다.
―창업한 게 2005년인데, 그때 55세였잖아요? 그 나이 땐 한국에서 남자들도 일을 그만둡니다. 창업은 너무 큰 도전 아니었나요?
“물론이에요. 정말 많은 지인, 가장 친하다던 친구도 ‘왜 네가 그걸 해야 되니?’ ‘너는 이제 50대야. 인터넷? 그건 20대 애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정신 차려!’라고 했어요. 전 인터넷 블로그도 52세 처음 쓰기 시작했거던요. 허핑턴포스트가 출범한 첫날에도 엄청난 혹평이 쏟아졌어요.”
―당시 ‘LA 위클리’ 기자가 ‘폭탄’이라고 혹평한 걸 봤습니다.
“네. 그런데 1년 뒤에 그 기자가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묻더라고요. ‘혹시 나도 글을 쓸 수 있느냐’고요. 저는 흔쾌히 ‘그렇게 합시다!’ 했죠(웃음).”
허핑턴 여사의 엄지손가락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부엌에서 음식을 하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칼로 베였다"고 했다. 그녀는 모든 질문에 기자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대답했고, 민감한 질문에도 언성을 높이거나 말이 빨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 굴곡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자신의 인생 역정을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저는 1950년 아테네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여섯 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어요. 그때 모두 말렸어요. '무슨 네가 유학이냐'고. 그런데 저는 해냈어요. 외국인으론 처음으로 케임브리지대학 총학생회장이 됐어요. 그리고 스물세 살 때 첫 책을 썼는데, 그때도 주위에서 '무슨 네 나이에 책이냐'고 하셨지요. 저는 살면서 수많은 두려움을 많이 겪었고, 그것을 돌파해 왔습니다.
▲ 허핑턴포스트 편집국을 찾은 아리아나 허핑턴 여사. / Damon Scheleur 허핑턴포스트 사진 기자 |
1971년에 당시 런던타임스의 저널리스트 버나드 레빈에게 푹 빠졌습니다(웃음). 우연히 음악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면서 알게 됐는데, 그를 만나면서 그의 글쓰기 방법, 사용하는 단어, 문화적 지적 능력을 모두 흡수했어요. 스물두 살 연상이지만 동료를 넘어 연인이 됐고, 그는 작가로서 제 멘토이자 롤모델이었어요. 정말 사랑했지만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고, 그래서 저는 관계를 청산하고 1980년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미국에 와서 마리아 칼라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전기를 쓰고, 많은 비판을 받았지요(웃음). 그다음 아시다시피 1986년 마이클 허핑턴씨와 결혼해 작가 겸 정치 운동가로 활동했고, 2003년엔 주지사 선거에도 나갔고, 지금 허핑턴포스트를 창업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실패
―그런데 여기까지 오기까진 순전히 100% 노력만이 아니란 지적이 있었어요. 런던타임스의 레빈을 만나 유명세를 치르고, 석유 억만장자인 마이클 허핑턴과 결혼하는 등 남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인데요.
"제 인생에 좋은 사람이 많았다는 게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빈은 저에게 정말 좋은 멘토였어요. 저는 7년 동안 그에게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마이클 허핑턴은 우리 두 아이의 아버지죠. 우리 결혼 관계가 그렇게 좋게 끝나진 않았지만, 우린 지금 정말 좋은 친구예요."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무엇이었나요?
"인생의 전반부에서 가장 큰 실패는 제 두 번째 책이 출판사 36곳 모두에서 거절당했을 때예요. 2003년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도 실패였지요. 고작 두 달 동안 선거운동하고, 선거 날이 되기 전에 중도 사퇴했거든요. '터미네이터(아널드 슈워제네거)'와 한판 대결을 벌여 진 것이죠(웃음). 정말 뼈아팠지만, 그 실패가 곧 새로운 벤처를 위한 원동력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인터넷의 힘을 뼛속까지 느낄 수 있었어요. 인터넷으로 재미있는 선거운동 홍보물을 만들어 인터넷에 뿌리고, 그게 전파되는 것을 보았지요. 또 온라인을 통해 선거 자금을 100만달러나 모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글을 한곳에서 보는 강력한 '컬렉터 블로그(collector blog)'를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
―만약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됐으면 지금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제가 그때 실패한 것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호호호."
―항상 가슴속에 지니는 말이 있나요?
"오, 물론이지요. 우리 어머니가 항상 '실패는 성공의 반대말이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디딤돌이다'라고 하셨어요. 또 하나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은, '천사들이 날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이 가볍기 때문이다'라는 겁니다. 무슨 일이든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요(웃음)."
▲ ① 케임브리지대 총학생회장 시절의 허핑턴. / 허핑턴포스트 제공 ② 허핑턴 포스트를 AOL에 매각한 뒤 팀암스트롱 AOL CEO와 기자회견 도중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 / 블룸버그 ③ 허핑턴을 인터뷰하는 이신영 기자. / Damon Scheleur |
성공
―2년 전 회사를 AOL(아메리카온라인)에 3억1500만달러에 매각했습니다. 그때 당신이 먼저 AOL에 접근했나요?
"아니요(웃음). 당시 AOL의 CEO였던 팀 암스트롱이 갑자기 전화를 해서는 '제의할 것이 있다'고 하더니 제가 당시 살고 있던 LA로 날아왔어요. 그가 CFO(최고재무책임자)를 같이 데려와 점심을 함께했죠. 그런데 저희 회사의 임원들은 탐탁지 않아 했어요. 그들은 기업 공개를 먼저 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들을 강력하게 설득했어요. '허핑턴포스트에 새로운 투자자들을 받는 것보다, 안정적인 IT 기업의 지원 아래 성장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요. 임원들이 앞자리가 '3'이 돼야 한다고 해서 제가 팀을 만났을 때 '3이 앞자리에 와야 한다'고 딱 한마디 했어요(웃음). 그런 다음 계약이 일사천리로 진행돼 NFL 수퍼볼(미식 축구 결승전)을 같이 보다가 하프타임에 도장을 찍었습니다(웃음)."
―종이 신문 발행은 생각해 보신 적이 없나요?
"전혀요! 저희 아버지가 언론인이셨어요. 그리스에서 작은 신문 사업을 하셨어요. 그러다 파산하고 빚더미 위에 올랐죠. 제가 절대 단 한 장도 인쇄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죠(웃음)."
―허핑턴포스트 때문에 미국이나 세계 신문사에 피해를 준다고는 생각 안 하시나요?
"(웃음) 우리 때문에 메인 스트림 미디어들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지요."
―기존 기사에 깊이가 없다는 비판이 있었죠. 작년에 데이비드 우드라는 종군기자가 작성한 '전장을 넘어서'란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았잖아요? 기분이 어떠셨나요?
"고품질 기사가 없다는 평가 때문에 몇 년 사이 많이 보강했어요. 상을 받은 기사는 10회짜리 기획인데,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전에서 중상을 입은 상이군인의 사회 적응을 다룬 것입니다. 저는 기존 뉴스에 감정이입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 기사는 감정이 많이 들어간 기사입니다."
▲ 허핑턴포스트 홈페이지 메인 화면 |
실험
―처음에 개인적 인맥을 통해 수소문해 모은 블로거가 몇 명인가요?
"한 500명 정도였어요. 지금은 4만명이 넘어요. 존 케리 상원 의원, 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 래리 데이비드, 게리 하트, 존 큐잭, 월터 크롱카이트, 부시 행정부에서 연설문 작성가로 일한 데이비드 프롬이 있었어요. 그리고 창립 후 조금 있다가 마이클 무어 감독, 앨 고어…. 그는 요즘도 계속 쓰고 있지요. 배우 제이미 리 커티스와 마돈나도 있었네요."
―블로거에겐 돈을 주지 않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끌어들인 분들은 대부분 사회 저명인사이고 블로그로 돈을 버는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존 케리 상원의원에게 가서 블로그 써주면 50달러나 100달러 주겠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요? 그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어요. 단지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를 확보했다는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능한 블로거는 어떻게 찾나요?
"매우 간단해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something interesting to say)가 있느냐만 봐요. 어떤 업종이든, 누구든 상관없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그런 심리를 활용하면 소년 가장이든 서점 주인이든 누구나 블로거가 될 수 있어요."
―실제 소년 가장 블로거가 있었나요?
"물론이죠! 클리블랜드주에 사는 데이비드 분이란 학생이 있어요. 그는 하버드대 입학 과정을 블로그로 꾸준히 게재했어요.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지 아세요? 진짜 하버드대에 입학했어요. 물론 허핑턴포스트 블로깅 경력도 큰 입학 점수로 작용했겠죠? 그건 인터넷 뉴스의 마법과 같은 일이에요! 누가 그 글을 읽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허핑턴포스트엔 매우 다양한 섹션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혼 섹션까지 있잖아요. 한국 신문에 '이혼'면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웃음) 이혼 섹션은 정말 인기가 많은 섹션 중 하나예요. 우리 삶의 깊은 문제로 사람들이 도움 받고 이야기를 털어놔야 하는 부분이거든요.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77개인데, 정말 모든 것을 다 다루고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하다면 말이지요. 우린 또 '빅 뉴스 페이지(big news page)'란 것도 있어요. 어떤 주제가 됐든지 아이템이 20개만 있으면 별도 페이지를 만드는 겁니다. 당신에 대해서도 빅 뉴스 페이지를 만들 수 있어요. 당신이 쓴 기사 20개만 있으면 만들 수 있거든요."
―허핑턴포스트의 성공 이유 중 하나는 '유저 참여형 소셜 뉴스'란 데 있다고 합니다.
"저는 기존 뉴스 사이트의 소셜 네트워크 접근 방식이 일방향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뉴스 사이트의 기사를 퍼가서 페이스북에 게재할 수 있지만, 반대로 페이스북에서 뉴스 사이트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허핑턴포스트는 페이스북의 정보를 허핑턴으로 담아 올 수 있습니다. 기사에 대한 댓글 역시 소셜 네트워크와 연동해 댓글을 쓰고 버튼을 누르면 그것이 그대로 페이스북에 게재될 수 있어요. 지금 저희 사이트는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AOL, 야후, 링크드인, MSN 핫메일 등 일곱 가지 아이디로 로그인할 수 있어요."
―하루에 올리는 기사가 몇 건이고, 댓글은 몇 건 정도인가요?
"하루에 기사 4000개가 올라가는데, 그중 블로그는 400개 정도입니다. 댓글은 한 달에 100만개 이상 달립니다. 가장 댓글이 많이 달린 기사가 미트 롬니의 '47% 발언(오바마 지지자를 비하하는 내용의 발언)' 비디오인데, 17만1751개가 달렸어요."
―악성 댓글도 많지 않은가요? 그런 건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2010년에 배지(badge)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화면의 자기 이름이나 글에 붙는 시각 이미지인데, 현재 허핑턴포스트는 '네트워커(networker)' '수퍼유저(superuser)' '모더레이터(moderator)'란 배지를 부여합니다. 팬과 추종자가 많으면 네트워커 배지를 받습니다. 댓글을 많이 달거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이야기를 많이 공유하면 수퍼유저 배지를 받습니다. 또 적절치 못한 댓글을 신고해 허핑턴포스트 스태프들이 그걸 보고 실제 댓글을 삭제했을 경우에 모더레이터 배지를 받습니다. 일종의 자정 기능을 하는 자원봉사 요원을 두는 거예요. 신고한 댓글 중 100개 이상이 삭제될 경우 직접 댓글을 삭제할 권한을 얻습니다. 독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지요."
▶ 허핑턴 포스트
그리스 출신 작가 겸 정치인인 아리아나 허핑턴이 2005년에 설립한 인터넷 신문사. 2011년에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을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방문자 수가 많은 언론사가 됐다. 2011년 아메리칸 온라인에 3억1500만달러에 매각됐으나, 아리아나 허핑턴은 여전히 회장 겸 편집장으로 남아 있다. 675명의 기자가 쓴 기사 외에 4만명의 블로거가 글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