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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산문집 펴낸 비평가 황현산 - 자칭 '야메 평론가'의 일침… 세상이여 무거워져라

게디 2013. 7. 10. 22:18

첫 산문집 펴낸 비평가 황현산

소설도 초판 다 팔기 힘든 시대… 詩 평론집이 4쇄까지 '이변'
문예지 등 정식 등단 안했는데 글만 보고 해설 청탁 줄이어

어려운 글은 잘 모르고 쓰는 글? 무슨 소리, 몇 번 읽으면 알게 돼

너무 빨리 달리는 '피로 사회'… 가벼운 것만 좇으면 만성 피로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비유하자면, 그는 지금 '비평계의 신경숙'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68) 고려대 명예교수. 일반 독자들이 작가의 소설에 탐닉하듯, 시인과 소설가들이 그의 비평을 아껴 읽는다. '엄마를 부탁해'의 200만부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지난해 펴낸 그의 시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은 지금까지 4쇄를 찍었다. 소설도 초판이 다 팔리지 않는 시대에 말이다. 그의 해설을 받고 싶다며 시집 출간을 미루고 줄 선 시인이 현재 5명. 지난해에는 젊은작가포럼(회장 서효인)이 수여하는 '올해의 아름다운 작가'로도 뽑혔다. 보름 전 출간된 그의 첫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난다)는 9일 2쇄가 나왔고, 젊은 문인들이 이 책 속 기품있는 문장을 트위터에 실어나르며 화제가 되고 있다. 칠순 임박한 생물학적 나이를 고려하면, 더욱 예외적 열기다.

―젊은 문인들이 특히 좋아한다.

"만만하니까 그런 거겠지(웃음). 대학 논문 심사에서 어떤 지적을 하면, 받아들이는 학생이 있고 변명하는 학생이 있다. 그런 학생들은 대개 안 크더라고. (나는) 되도록 받아들이려고 애를 썼다. 대학원 수업을 하면 1대1로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때 젊은이들과 토론하고 대화한 덕도 봤을 거다."

이 모든 숫자와 열기가 문단 내부에서는 희귀한 현상이지만, 그러나 대중 입장에서 그는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그래봐야 찻잔 속의 태풍이요, 문단 내의 돌풍은 아닐까. 생각을 확장하면, 지금 순수문학의 처지도 마찬가지. '밤이 선생이다'에는, 대중가요 가사에서 '시'를 발견하고, 드라마 한 편으로 예술적 감명을 받는 요즘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
불문학자 황현산은 초현실주의를 연구하고 번역한다. 전공자들도 손을 내저을 만큼 어렵지만, 현대 미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예술사조다. 젊은 시인 상당수가 큰 자극을 받았다고 고백할 때, 그는“내 노력과 열정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구나 안도한다”고 했다. /이명원 기자
―대중문화만으로도 충분히 감동과 위로를 받는 세상이라고 했다. 이런 세상에서 시가, 문학이 무슨 소용인가.

"대중가요 한 곡으로, 연속극 한 편으로 세계를 점령하는 대한민국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만하지. 그런데 연속극, 대중가요는 시를 소비할 뿐,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 시를 생산하는 공장이 문학이다. 공장이 중단되면, 나중에는 결국 똑같은 얘기만 듣게 된다. 한류의 활기도 금방 사라질 거다. 돈도 못 벌고 때로는 굶어죽기까지 하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대중문화의) 원료를 만드는 거다."

―무례하지만,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의 (자기 위안적) '정신 승리' 아니냐 묻는다면.

"예전보다 문학판이 더 가난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가난하니까 오히려 겁내지 않는다. 활기와 긍지는 더 커졌다고 본다. (웃으며) '정신 승리'가 집단화됐다고 할까. 시인은 미래적 전망을 자신의 미학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살아서는 보지 못할, 순결하고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전망이지. 그것이 현재의 내 삶을, 현실에서의 실천을 규정한다. 이 희망을 잃지 않으면, 개인을 넘어 연대가 생긴다. (머릿속에서만 자기가 이겼다고 믿는) 정신 승리와는 다르지."

그는 "어려운 글을 읽으려고 애쓰지 말라. 그런 글은 저자 자신도 무슨 소린지 모르고 쓴 글이다"라는 한 문화비평가의 글에 화낸 적이 있다.

―어려운 책은 왜 필요한가.

"그 비평가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너무나 명백하다. 당장 나만 해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읽어도 몰랐지만, 대학생 때 다시 읽으니 알게 되는 책이 있더라고(웃음). 아이가 울면 왜 우는가 알아보는 게 도리지, 외면하면 되겠는가. 자폐증을 가진 어떤 아이가 마을의 위기를 미리 알게 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이는 그 위기를 예방하려는 건데,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를 위험분자 취급하지. 안타깝게도 아이가 말을 일반인처럼 하게 되면, 예지력은 사라진다. 때로는 암시에 의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다. 내 학생들이나 자식들이 그 비평가의 말에 현혹될까 두렵다."


	어수웅 기자
어수웅 기자
―스마트폰 시대 이후, 현대인은 진지하고 어려운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된 것 같다.

"고속도로를 나가보면, 걸핏하면 140~150㎞다. 달릴 때는 모르지만, 나중에 보면 자기도 모르게 골병이 들어있다. 겉으로는 잘 모른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바일 기기나 SNS가 주는 피로감이 엄청나다. 모두가 지쳐있다. 이러니 책이건 영화건, 하하깔깔 웃고 마는 걸 보고 싶지 심각한 걸 보겠는가. 하지만 '피로사회'에서 빠져나오려면 지쳐 있을수록 진지한 질문과 사유가 필요하다. 이 질문을 피해가면, 만성피로가 될 뿐이다."

그는 자칭 '야메(비합법적인·일본어 やみ·暗에서 온 말) 평론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단이 아니라, 우연히 쓴 글 한 편이 인정받아 계속 청탁을 받게 된 희귀한 사례다. 강원대 교수로 있던 40대 중반, 당시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 청탁으로 그 기관지인 월간 '문화예술'에 썼던 번역론이 문단 안팎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고, 세 살 위였던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이 세상을 떠났을 때 추모사를 청탁받아 '르네의 바다-불문학자 김현'을 썼다. 지금이야 자칭 평론가가 흔하디흔한 세상이지만, 그때만 해도 전례가 없던 데뷔이자 주목이었다.

뒤늦은 데뷔 이후 10년 만에 첫 비평집 '말과 시간의 깊이'(2002), 다시 10년이 흘러 두 번째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2012)을 제출했을 뿐인 과작(寡作)의 평론가.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구절이 있다. 황현산은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세계라고 했다. 그는 밤에 몰입하고, 젊은 문인들은 그에게 매혹되며, 대중문화는 그 젊은 문인들이 만들어낸 시와 문장을 탐욕스럽게 소비하는 선순환을 떠올렸다. 혹은 그 모든 구성요소들이 아름답게 순환하는 뫼비우스의 띠. 다시 한 번, 밤이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