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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이 50 넘어 실직, 호주로의 영어연수 추억

게디 2006. 9. 13. 15:18

97년 11월  한국에서는 경제적 절대 위기를 맞아 실질적으로 IMF 금융 통제하에 들어 가면서 모든 기업들이 군살 빼기에 들어 갔고 기업에서는 마른 수건에서도 물을 짜내라는 초긴핍 경영에 들어 갔었다.

사실 많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정년 퇴직을 할 때까지 마르고 닳도록 근무를 하다가 무대의 뒤안길로 아름다운 퇴장을 꿈꾼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포부(?)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는 아마도 동화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에 불과하리라.


필자도 당시 근무 연수에 따른 명예 퇴직금을 차등 배정해 주겠다는 회사의 정책에 따라 나 자신을 냉정하게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냉철한 분석에 들어 갔다. 사실 회사가 나에게 요구하며 조여 오는 수위와 내 자신의 업무 능력(Capability)을 분석해 보면 내 자신이 회사에서 영양분이 떨어져 꼭지가 떨어져 나갈 때까지의 버틸 수 시간을 대충 머리로 헤아려 볼 수가 있다.

당시로는 이미 살생부 명단에 포함되어 있어 자신이 자의로 선택이 불가능한 사원과 회사에서 나가 주었으면 하는 부류(이런 사원류는 그가 부서장이라 할 지라도 그가 데리고 있던 차장이나 과장 밑에 강제로 조직을 편성시켜 놔 수치심으로 버틸 수 없게 만듬)의 사원 그리고 기타 의원 퇴직의 세부류로 구분이 가능하였다.

나는 의원 퇴직이 가능한 부류에 속했지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수술대에 올려 평가를 해 보니 향후 약 3년간은 회사에서 더 버틸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었다. 그렇다면 내가 의원 퇴직에 따른 명예퇴직을 회사에 신청했을 때에 내가 회사로 부터 얻어 낼 수 있는 과실(수익) 계산에 들어 갔다.

명예 퇴직금 2천 만원, 국민 연금 1천 8백만 원(98년 10월까지 퇴직자에 한해 일시불로 수령이 가능), 실업 급여 수당 3개월 분 3백 15만원, 합계 약 4천 1백만 원, 당시 이자율 월 2%를 3년 복리로 치면 약 7천 만원, 생활비를 아껴서 쓴다면 충분히 3년은 그 명퇴금 수익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계산이 섰었고 냉철한 판단아래 나는 그 때까지의 약 25년간의 직장 생활을 과감히 털고 일어서기로 마음을 정했다.

명퇴를 실행에 옮긴 후 당시 실업 급여를 하루에 3만 5천원씩을 받으면서 실직자 무료 SOHO(Small office Home Office: 쉽게 말해 중국 보따리상) 교육을 받던 중 매경 신문에서 유학원에서의 해외 영어 어학연수 광고를 보고나서 나는 호주 시드니 영어 해외 연수를 계획을 하였는데 당시 대학 3년 재학 중인 딸이 지 에미에게 하는 말이 자신이나 해외 연수를 시켜 주지 50세도 넘은 아빠가 뒤늦게 주책이시라고 말하더란다.

나는 25년의 직장 생활에서 영어와는 크게 관계가 없는 업무를 수행했었기에 외국에 영어 연수는 새로운 도전 임에 틀림없었다. 유학원에서 지정해 준 시드니 college에 가서 우선 먼저 영어 테스트를 거쳐 자신의 실력에 미치는 제일 적합한 반(class)에 들어 가게 되어 있다.

 

영어 테스트는 4가지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첫째 서류 시험, 둘째 카오디오를 청취해서 시험지에 빈 칸 채우기, 세째 빈 시험 용지에 자신의 이력 설명및 학교에 입학을 하고자 하는 사유, 마지막 네번 째로 직접 호주인과 인터뷰를 갖는다.

영어 테스트를 거친 나는 학생시절에 영어를 좋아했던 이유로 해서 결과적으로 호주인 영어교수로 부터 제일 높은 학급에 배정을 받았다. 아마도 호주인 인터뷰인 영어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그 녀가 내가 시드니에 영어를 배우러 온 목적에 대한 질문에 단지 나는 'I am here only to brush up my dusty English.'라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대답을 해주었던 것이 높은 영어점수를 받는데 주효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나는 평소에 영어 해외연수는  그 곳에 영어를 배우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다.
단지 좀 더 영어를 배우기 나은 환경에서 자신이 그들에 흡수되면서 스스로 체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외국어는 특별한 공부가 아닌 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관습을 그대로 모방하면 되는 학문이다. 나는 그 곳에서 영어를 익히기 위하여 우측주머니에는 60년대 부터 사용했던 한영 사전을 찔러 넣었고 좌측 주머니에는 영일 사전을 넣고 다녔다. 영일 사전은 그동안 익힌 일어를 잊지 않기 위한 또하나의 수단이었다.

학교에서 하숙집까지 걸으면서 간판 등에 나오는 모르는 단어는 오른쪽 주머니 영일사전으로 찾아 보았고 뭔가 외국인에게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면 왼쪽 주머니의 한영사전을 이용했었다.


영어의 한 문장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길을 걸으며 만나는 외국인 마다 똑같은 질문인  "How can I get to the Burwood station?" 을 물으면서 다녔다. 물론 나야 생활 영문을 익히기 위하여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반복적 던지는 것이었지만 질문을 받는 그들은 어쨌던 처음 보는 나로부터 길을 묻는 하나의  질문을 받는 것일 뿐이었다.

밤에는 밤잠을 줄여 가면서 내 귀를 넘쳐 흘러 가는 텔레비 소리와 씨름을 했었다. 그래도 국내와 비슷한 '사건 25시' 비슷한 범죄인 추적 프로그램은 그런대로 재미있게 봐 줄만 했었다.

3 개월 여어연수를 모두 마치는 마지막 날에는 나를 지도 했던 7, 8 명의 호주인 교수들이 약간의 기금을 모아 나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고 또한 그들이 연합을 하여 합동 댄 파티를 벌여 주었으며 그들 각각이 나를 위해 축가도 불러 주었었다.


나에게 왜 그리 환대를 해주냐고 그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의 대답인 즉 이 학교를 거쳐 간 학생들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기에 기념적인 교수들의 특별한 쇼라고 설명을 내게 해주엇다. 하기는 그들 교장보다도 내가 더 나이가 많았었고 나와 함께 배운 급우들은 모두 나의 자식또래(주로 타국의 영문학과 영어과 출신들)였으며 내가 그들과 나름대로 어울려야만 하는 나의 고충을 이해해주는 셈이었다.

나를 환대해 주었던 그들 교수들이 반대로 나보고 답례 차원에서 5분간 open speech를 요구해 온다. 그래서 나는 그들 교수와 나의 급우들 앞에서 여기서 나의 3개월 생활은 나에게는 상당한 보람이 있었고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가능한 한 나의 딸과 아들도 이 college에서 연수를 시키겠다고 답례를 해주었더니 교수들과 급우들이 모두들 일어나 우래와 같은 환송박수로 종(終)파티(send up party)를 뒤로 한 채 나는 그 학교를 나와 버렸다.

한국에 돌아 온 후 중소 기업에 들어 가 약 5년간 일본, 중국및 동남아에 수출 업무를 담당할 수있었으며 그 후에 '남아일언중천금'으로 내 딸및 아들을 그 곳 호주에 영어 어학연수를 거치게 했음은 물론이다.  우리 딸도 그 곳 호주 시드니에서 영어 어학 연수를 한 덕분에 현재 모 중소기업에서 해외영업 업무를 보고 있다.  우리 딸, 아들과 나는 모두 호주 시드니에서 동문수학을 한 셈이다.

출처 : 기타
글쓴이 : 주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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