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1631811C4BD02ABF76)
야구계의 황금세대 '92'학번 스타들이 고등학생일 때 사진.
1991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려고 열심히 훈련 중일 때다.
손수레를 끄는 휘문고 임선동과 바로 오른편에서 해맑게 웃는 경남상고 차명주가 보인다.
차명주의 옆에서 양쪽 어깨에 가방을 맨 이가 광주일고 박재홍이다(사진=주간야구)
|
강민호, 조정훈, 장원준(이상 롯데), 박석민(삼성), 이용규(KIA) 정우람(SK),
오재원, 김재호(이상 두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포지션? 아니다. 고향? 그럴 리가. 학교? 천만에. 답은 나이다.
이들은 1985년 소띠 동갑내기이다. 학번으로 치자면 04학번.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스타로 발돋움한 이들을 가리켜
이용철 KBS 해설위원은 “그라운드의 황금세대”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황금세대’의 출현이 이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들보다 강력한 황금세대가 출현한 적이 있다.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차명주, 설종진, 박종호 등 1973년 소띠,
92학번 야구선수들이 한꺼번에 배출됐을 때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은 “한국 야구사에서 92번 세대야말로 진정한 황금세대였다”며
“이들이 우리 야구계에 미친 영향은 지진으로 치면 7.5 이상의 강진이었다”고 말했다.
7.5의 강진과 같았던 92학번
92학번 황금세대의 선두주자 박찬호.
미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방콕아시아경기대회와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국가대표로도 뛰었다(사진=두산)
|
허 위원의 말대로 92학번의 출현은 7.5 이상의 강진과 비교된다.
이들은 야구계의 선입견과 편견을 송두리째 무너트렸다.
대표적인 게 ‘한국인은 절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없다’는
이른바 메이저리그 신화를 깨트린 것이다.
공주고 출신의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다.
1994년 LA 다저스와 계약하고서 바로 빅리그로 진출한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 시속 160km의 강속구를 던지며 ‘코리안 특급’으로 맹활약했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천500만 달러에 계약했을 땐
명실 공히 빅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됐다. 그러나 이후 허리부상으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지난해 내셔널리그 우승팀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불펜투수로 재기에 성공한 박찬호는
올 시즌 자신의 마지막 꿈인 월드시리즈 챔피언 반지를 끼려고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4월 17일 (한국시간) 15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랐지만
조만간 복귀해 양키스 불펜에서 뛸 전망이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진출의 물꼬를 텄다면 조성민은 대학졸업 후 국내 프로 무대를 거치지 않고
곧장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최초의 선수였다.
신일고 출신의 조성민은
1995년 고려대 졸업과 함께 일본 최고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계약금 1억5천만 엔, 연봉 1천200만 엔의 초특급 대우였다.
조성민은 요미우리의 기대대로 1998시즌 7승을 거두며 팀의 중심투수로 성장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오르막 대신 내리막길을 향했다.
2002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뒤 2005년 한화 입단했지만 뚜렷한 성적은 내지 못했다.
톱스타 고(故) 최진실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조성민은
현재 재혼해 착실히 스포츠에이전트 회사를 운영 중이다.
'풍운아' 임선동. 30대 이후 야구팬들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투수였는지 기억할 것이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호투하는 추억의 선수가 됐다(사진=넥센)
|
92학번 투수들 가운데 고교시절 가장 돋보였던 이는 단연 임선동이었다.
1989년 고교 1학년 때 봉황대기대회 우수투수에 뽑히며 일찌감치 야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대학 졸업반 때인 1991년, LG로부터 당시 해태 선동열(현 삼성 감독) 연봉의 5배에 이르는
계약금 5억 원에 입단 제의를 받은 건 어쩌면 당연한 순서였다.
그러나 임선동은 LG의 제의를 거절했다.
대신 다이에(소프트뱅크의 전신) 호크스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제2의 선동열’로 불린 그를 1차 지명구단인 LG가 순순히 놔줄 리 없었다.
LG와의 법정소송으로 결국 그는 일본땅을 밟지 못했다.
1997년 뒤늦게 LG 유니폼을 입은 임선동은 1999년 현대에 둥지를 틀었다.
2000년엔 18승으로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그러나 2001년 14승 이후 부상과 부진을 거듭하다가 2007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현재는 서울에 살며 개인사업을 준비 중이다.
과거 현대 동료가 그의 소식을 궁금해할 정도로 야구계와 담을 쌓은 채 살고 있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연락이 닿은 임선동은 근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평범한 가장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조만간 야구계에 돌아와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놓겠다”며 말을 아꼈다.
임선동의 지인은
“부동산 재벌이라는 항간의 소문과 달리 항공사 승무원 출신의 아내와 조용히 살고 있다”며
“원체 자존심이 강해 말은 하지 않지만, 야구계를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다”라고 귀띔했다.
현역 은퇴 뒤 대부분은 지도자로
차명주는 야구로부터 많은 수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야구를 위해 많은 걸 되돌려 주려고 한다.
바쁜 와중에도 MBC ESPN의 '날려라 홈런왕'에 코치로 출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등 이른바 ‘빅3’가 오른손 투수 일색이었다면
차명주는 92번을 대표하는 왼손 투수였다. 경남상고-한양대를 졸업한 차명주는
1996년 당시로는 파격적인 5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롯데에 입단했다.
그러나 데뷔 첫해 2승5패 8세이브에 그치는 등 이름값을 하지 못하다가
1999년 두산으로 트레이드 됐다. 이후 차명주는 좌타자 전문 투수로 거듭나며
2005년 5월4일 대전 SK 전서 ‘최연소 5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2006시즌이 끝나고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했지만, 차명주는 전격은퇴를 선언했다.
“돈에 연연하지 않고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는 자신의 오랜 꿈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현재는 재활 전문가로 변신해 서울에서 ‘젬 휘트니스’를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MBC ESPN의 ‘날려라 홈런왕’에 코치로도 출연 중이다.
부산고 출신의 염종석은 입단 첫해였던 1992년 17승 9패 6세이브의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신인왕과 투수 골든 글러브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당시 무리한 경기 출전으로 어깨 수술을 수차례 받은 이후 성적이 조금씩 하락하다가
2009년 은퇴했다. 현재는 롯데 2군 투수코치로 활약 중이다.
대구상고 출신의 전병호와 원주고 에이스였던 안병원도
각각 삼성 1군 불펜코치와 원주고 감독으로 지도자생활을 하고 있다.
공주고 출신의 홍원기는 넥센에서 원정 전력분석요원으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수비코치로 활약 중이다. 홍원기는 선수들 사이에서 꽤 신망이 높다.
정민철은 현역 때도 성실했고, 은퇴한 뒤에도 여전히 성실한 코치다.
현역시절 팬서비스에서 가장 헌신적인 이로 불렸다.
한화의 젊은 투수들이 배워야하는 건 그의 통산기록이 아니라 그가 야구를 대했던 자세다.
그런 자세가 없다면 20승을 거둬도 그저 '잘했던 선수'로 기억될 뿐이지,
정민철처럼 '전설'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사진=한화)
|
대전고 출신의 정민철 역시 친정팀 한화에서 투수코치로 활동 중이다.
1992년에 빙그레 (한화의 전신)에 입단한 정민철은
통산 161승128패, 10세이브, 평균자책 3.51을 남기고 지난해 시즌 도중 은퇴했다.
92학번이긴 하지만, 정민철은 1972년생이다. 동기들보다 한 살 많다.
충남중 3학년 때 대전고에 진학할 요량으로 1년 유급했기 때문이다.
어느 야구관계자는 "92학번 스타 선수 가운데 지도자로 가장 대성할 이"로 정민철을 꼽았다.
불운과 비운의 92학번 스타들, 손경수와 설종진
92학번 출신들이 모두 성공만 한 것은 아니다. 1992년 이후 실패를 맛본 이들도 꽤 된다.
대표적인 이가 경기고 출신의 손경수다.
시속 140km 중후반 대의 강속구와 횡으로 꺾이는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던 손경수는
고교졸업반 때 대학과 프로의 치열한 스카우트전에 휘말렸다.
당시 OB(두산의 전신)는 계약금 2억 원을 제시하며 그의 스카우트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손경수가 바란 계약액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대학 졸업 뒤 프로에 입단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 손경수는 미련 없이 홍대를 선택했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1993년 손경수의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장기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손경수는 대학에 자퇴서를 내고 그해 OB에 입단했다.
하지만, 자기관리 실패와 간염이 겹치며 1군 무대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채
1995년 임의탈퇴 선수로 처리됐다.
OB 시절의 손경수(사진=야구인명사전) |
김태룡 두산 이사는
지금도 ‘손경수’란 이름만 나오면 한숨을 내쉰다.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체격으로
해마다 10승 이상이 가능했던 투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손경수의 마음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던 김 이사는
1990년대 후반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손경수의 전화였다.
“다짜고짜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고 애원하기에 ‘일단 몸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런데도 ‘볼보이라도 좋으니 야구장에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졸라
‘구단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기다려도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손경수는 광주에서 식당과 카페를 하다가 대전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일고 시절 전국대회에서 타율 4할2푼1리의 놀라운 타격으로
‘초고교급 타자’로 불렸던 설종진도 92번 스타다.
1991년 야구전문지였던 <주간야구>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고교선수는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이 아닌 바로 설종진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운의 스타다.
중앙대 입학 후 야구장의 제초작업을 한 뒤 잔디를 소각하다가 그만 양다리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어처구니 없는 사고였다. 있어서는 안 될 인재(人災)였다. 설종진은 2년 동안 투병했다.
그리고 눈물나는 노력 끝에 재기했다.
1996년 2차 드래프트 2순위로 현대에 입단하자 언론은 그를 가리켜 ‘인간승리’라고 했다.
그러나 신경을 살리려고 피부를 이식했던 부위가 문제가 돼 결국,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현재는 넥센 2군 매니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1991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청소년대표팀이 훈련 중이다.
러닝훈련 중인 신일고 조성민과 바로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임선동이 보인다(사진=주간야구) |
강릉고 포수 출신의 이재주는
지난해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소속팀 KIA로부터 재계약 통보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재주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딱’ 1년만 더 뛰고 싶다”며
현역생활에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두산, 넥센에서도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특히나 넥센이 적극적이었다.
김시진 감독은 이광근 수석코치를 통해 이재주에 영입의사를 전달했다.
계속 현역으로 뛰길 원하는 이재주와 그를 원하는 넥센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재주가 갑작스레 넥센의 제의를 거절하며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김 감독은 “이재주가 ‘죄송합니다. 잘 할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현재 이재주는 주변과 연락을 끊은 상태다.
이밖에 박종호, 최원호(이상 LG), 박재홍(SK), 최기문(롯데), 송지만(넥센),
이영우(한화), 김종국(KIA)은 아직 현역에서 뛰고 있다.